여헌 장현광

  • 생애와 학문
  • 주요저서
  • 유적
  • 유품
  • 문인들

문인들

> 여헌 장현광 > 문인들 > 대표 문인들
여문의 대표 문인
여헌선생 급문 제현

권봉(權崶) / 1592년(선조 25)~1672년(현종 13) / 旅門十賢

권봉(權崶)의 자는 흥서(興瑞), 호는 성재(省齋)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권극립(權克立)의 5남 중 독자로 태어났다. 여헌(旅軒) 문하에서 수학하며 성리학에 대한 공부에 전념하였다. 여헌이 만년에 입암(立巖)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낼 때, 함께 하였으며, 여헌 문하의 자공(子貢)으로 평가되었다. 『여헌집(旅軒集)』 부록에 권봉이 스승인 여헌에 대해 기록한 「경원록(景遠錄)」이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성재공일고(省齋公逸稿)』가 전한다.

김경장(金慶長) / 1597년(선조 30)∼1653년(효종 4) / 旅門十哲 / 旅門十賢

김경장(金慶長)의 자는 덕승(德承)이고, 호는 구암(龜巖)이다. 아버지는 여헌의 대표적인 문인인 김종효(金宗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났다. 광해군 9년(1617)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꺼려서 정시(庭試)에 응하지 않고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주희(朱熹)의 『가례』에서 미비한 것을 보충하여 「상제십조(喪制十條)」를 저술하였고, 『여헌선생문집(旅軒先生文集)』을 교열하였다. 1653년 김응조(金應祖)의 추천으로 황산찰방(黃山察訪)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예설과 역학을 깊이 연구하여 『예원집설(禮苑集說)』 2권과 「천문성상도(天文星象圖)」를 지었으며, 『구암문집(龜巖文集)』 4권이 전한다.

김응조(金應祖) / 1587년(선조 20)∼1667년(현종 8) / 旅門十哲 / 旅門十賢

김응조(金應祖)의 자는 효징(孝徵)이고, 호는 학사(鶴沙) 또는 아헌(啞軒)이다. 17세 때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했으며, 광해군 5년(1613)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여헌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1623년에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 문과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의 형제 9명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조·효종·현종 삼대에 걸쳐 수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능했으며,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천의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사집(鶴沙集)』, 『사례문답(四禮問答)』, 『산중록(山中錄)』, 『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김종효(金宗孝) / 1553년(명종 8)∼? / 樑頌15賢

김종효(金宗孝)의 자는 사행(士行)이고, 호는 반월당(伴月堂)이다. 여헌의 대표 문인 중 한 사람인 구암(龜巖) 김경장(金慶長)의 아버지이다. 현재의 경북 구미시 옥계동에 정착한 이후 반월당 서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는 데 힘을 썼다. 그래서 이 지역을 주변 사람들은 젊은 선비들이 모여 들어와 문사가 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문림(文林)’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노형필(盧亨弼) / 1605년(선조 38)∼1644년(인조22) / 旅門十哲

노형필(盧亨弼)의 자는 정보(貞甫)이고, 호는 운제(雲提) 또는 연수헌(淵水軒)이다. 인조 14년(1636)에 청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병자호란에 큰 공을 세웠다. 원래 학문과 덕행이 있어 나라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과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로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용산리 황산(荒山) 서편에 있었던 용암서원(龍巖書院)이 창건될 때 노형필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다고 전한다.

류진(柳袗) / 1582년(선조 15)∼1635년(인조13) / 旅門十哲 / 旅門十賢

류진(柳袗)의 자는 계화(季華)이고, 호는 수암(修巖)이다. 아버지는 퇴계의 고제(高弟)인 류성룡(柳成龍)이다.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운 후, 아버지의 권유로 여헌 문하에 나아갔다. 광해군 8년(161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이 되었다. 저서로는 『수암집(修巖集)』이 전한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박유문(朴有文) / ?~? / 樑頌15賢

박유문(朴有文)의 본관은 울산이다. 여헌과 같은 문중인 장경한(張景翰)의 사위이다. 성환찰방(成歡察訪)과 감찰(監察) 등을 역임했다고 전한다.

박지율(朴之㐕) / ?~? / 樑頌15賢

박지율(朴之㐕)의 본관은 죽산이다. 자세한 인생 역정은 전하지 않으나, 여헌의 초기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신열도(申悅道) / 1589년(선조 22)∼1659년(효종 10) / 旅門十哲 / 旅門十賢

신열도(申悅道)의 자는 진보(晉甫)이고, 호는 난재(懶齋)이다. 교리를 지낸 신달도(申達道)의 동생이며, 형제 모두 여헌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여 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인조 2년(162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였다. 문집으로는 『나재집(懶齋集)』 9권 4책이 있으며, 『선사지(仙槎志)』와 『문소지(聞韶志)』 등도 편찬하였다. 『문소지』는 스승인 여헌의 권유로 편찬한 의성현의 읍지이다. 경북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에 위치한 단구서원(丹邱書院)에 배향되었다.

신우덕(申祐德) / 1581년(선조 14)~1663년(현종 4) / 樑頌15賢

신우덕(申祐德)의 자는 여가(汝嘉)이다. 약관의 나이에 여헌 문하에서 천인성명(天人性命)의 학문을 연구하였고, 예법과 덕행을 함양하여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였다고 전한다. 후인들이 곤산서원(崑山書院)을 건립하여 제향하고 있으며,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에 유허비가 있다. 사후에 고인(古人)이 추호(追號)한 뜻에 따라 장학(張澩)이 ‘진정(眞靜)’이라 사시(私諡)하였다.

안응창(安應昌) / 1603년(선조 36)∼1673년(현종 14) / 旅門十賢

안응창(安應昌)의 자는 흥숙(興叔)이고, 호는 백암(柏巖)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除授)되어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볼모로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인조 18년(1640)부터 3년 동안 모시다가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 일행과 같이 환국하였다. 그 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 낙향(落鄕)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저서로는 『백암문집(柏巖文集)』 5권이 있다. 사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우윤(漢城右尹) 순원군(順原君)에 추증되었다.

이수언(李秀彦) / 1571년(선조 4)~1643년(인조 21) / 樑頌15賢

이수언(李秀彦)의 자는 사미(士美)이고, 호는 추모헌(追慕軒)이다. 동생 수준(秀俊)과 함께 여헌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부지암정사를 지을 때 동문 14현과 함께 힘을 다하였다. 견산(見山) 장명상(張命相)이 찬한 묘갈명(墓碣銘)이 전한다.

이주(李𦁖) / 1599년(선조 32)~1669년(현종 10) / 旅門十哲

이주(李𦁖)의 자는 신언(愼彦)이고, 호는 학가재(學稼齋)이다. 여헌의 문하에 취학하여 겨우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미사오지(微辭奧旨)를 보면 곧바로 이해하였고, 선생을 섬기기를 부모 섬기듯 하였다고 전한다. 향시에 합격한 뒤 회시의 과장에서 난잡함을 보고 출사(出仕)의 뜻을 끊고 학문에 힘썼다.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 있으며, 충신자량(忠信慈良)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당대의 석학들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받아 「동규(洞規)」를 지어 교화에 힘쓰며 풍속을 바로잡았다. 문집인 『학가재집(學稼齋集)』 6권 3책이 전한다. 덕암서원(德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장경우(張慶遇) / 1581년(선조 14)∼1656년(효종 7) / 旅門十哲 / 旅門十賢 / 樑頌15賢

장경우(張慶遇)의 자는 태래(泰來)이고, 호는 만회당(晩悔堂)이다. 임진왜란 때는 10여 세의 나이로 할머니를 모시고 금오산(金烏山)·청송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란하였고, 이후 「학교의식」을 지어 학교교육의 지침으로 삼았다.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식년과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광해군대에 이르러 어지러워져 가는 조야(朝野)의 모습을 바로잡고자 『저법육설(著法六說)』을 지어 시행하였고, 이이첨(李爾瞻)의 행패가 심해지자 「청참이이첨소(請斬李爾瞻疏)」를 올려 이이첨을 참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헌 사후 『여헌집』 간행을 주도하였고, 화산서당(花山書堂)을 건립하여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만회당집(晩悔堂集)』 4권이 전한다. 훗날 옥계사(玉溪祠)에 제향되었다.

장광한(張光翰) / 1561년(명종 16)~1624년(인조 2) / 樑頌15賢

장광한(張光翰)의 자는 사거(斯擧)이고, 호는 자성정(自惺亭)이다.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 장곤(張崑)이다. 형제인 장천한·장경한·장용한·장봉한·장홍한과 함께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여 ‘육한(六翰)’ 혹은 ‘육문장(六文章)’이라고 불렸다. 사후에 여헌이 묘갈문을 지었다.

장내도(張乃度) / 1573년(선조 6)~1644년(인조 22) / 樑頌15賢

장내도(張乃度)의 자는 입보(立甫)이고, 호는 검곡(儉谷)이다. 여헌의 고제(高弟) 중 한 사람인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의 동생이다. 예서(隸書)와 산술(算術)에 능하였으며, 역학에도 밝아 여헌이 『역학도설(易學圖說)』을 저술할 때 산수 관계는 서로 의론하여 정하였다 전한다.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장내목(張乃睦) / ?~? / 樑頌15賢

장내목(張乃睦)의 본관은 인동이다. 그의 생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여헌과 같은 문중으로서 일찍이 여헌의 문하에 입문한 것으로 파악된다.

장내범(張乃範) /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 樑頌15賢

장내범(張乃範)의 자는 정보(正甫)이고, 호는 극명당(克明堂)이다. 타고난 성품이 중후하여 어릴 때부터 행실이 남달랐다고 전한다. 9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하고 곡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고 한다. 여헌(旅軒)뿐만 아니라 한강(寒岡)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 저서로 『양생금단계(養生金丹契)』, 『가례의절(家禮儀節)』과 문집이 있다. 사후에 공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에 있는 옥계사(玉溪祠)와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에 있는 소암서원(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장내정(張乃貞) / 1579년(선조 12)~? / 樑頌15賢

장내정(張乃貞)의 자는 정보(貞甫)이고, 호는 수훈재(守訓齋)이다.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증손이다. 어려서 여헌 문하에 입문하여 부지암정사 건립을 주도하였으며, 충청도 단양군수를 역임하였다.

장덕원(張德元) / 1569년(선조 2)∼1638년(인조 16) / 樑頌15賢

장덕원(張德元)의 자는 사순(士順)이고, 호는 무민당(无憫堂)이다. 기산(岐山) 장급(張岌)의 아들이다. 어려서 여헌 문하에 입문하였으며, 기산(岐山)에 은거하여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온유하고 문명(文名)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장제원(張悌元) / 1556년(명종 11)∼1621년(광해군 13) / 樑頌15賢

장제원(張悌元)의 자는 중순(仲順)이고, 호는 심곡(深谷)이며, 학거(鶴渠) 장순(張峋)의 아들이다. 여헌보다 2살 어리며 일찍부터 여헌에게 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내범(張乃範), 이보(李輔), 김윤안(金允安)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김해(金垓)의 막하에 들어가 인동의 정제장(整齊將)으로 활약하였다. 만년에 선산의 심곡으로 이사하여 정자를 짓고 꽃을 가꾸었다. 여헌뿐만 아니라 한강(寒岡)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시문집으로는 『심곡문집(深谷文集)』 3권 2책이 있으며, 그 속에 「송여헌선생서(送旅軒先生序)」가 있다. 사후에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으며, 칠곡군 가산면 하판동에 있는 봉림서원(鳳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정극후(鄭克後) / 1577년(선조 10)∼1658년(효종 9) / 旅門十哲 / 旅門十賢

정극후(鄭克後)의 자는 효익(孝翼)이고, 호는 쌍봉(雙峯)이다. 일찍이 여헌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여헌이 그의 비범함에 감탄, 붕우의 예로 대하였다고 전한다. 인조 12년(1634) 거의 60의 나이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나 수개월 후 노환으로 사퇴하였다. 그 뒤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삼성산(三聖山) 아래에 집을 짓고 산천과 벗하며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자득(自得)하는 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후학양성을 소임으로 하였다. 배우지 못한 유생들에게 제사 지내는 법을 익히게 할 목적으로 『문묘사향지(文廟祀享志)』를 지었으며,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단군·기자 이래 신라·고려의 고사를 잘 알게 하고자 『역년통고(歷年通攷)』를 지었고, 설총(薛聰)·김생(金生)·최치원(崔致遠) 등 삼현(三賢)의 사적(事蹟)이 산실(散失)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서악지(西岳志)』를 편찬하였다.

정사진(鄭四震) / 1567년(명종 22)~1616년(광해군 8) / 旅門十哲 / 旅門十賢

정사진(鄭四震)의 자는 군섭(君燮)이고, 호는 수암(守庵)이다. 일찍이 여러 친구들과 자양동에 들어가 과거 공부를 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여헌의 문하에서 학덕이 높은 사람들과 교유하여 그의 학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선조 39년(1606) 왕자의 사부(師傅)를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라에 상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채식을 하였고, 항상 몸가짐이 독실하여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하였다. 4권 2책의 『수암집(守庵集)』이 전하며,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의 입암서원(立巖書院)과 경주시 안강읍(安康邑) 대동리(大洞里)의 직천서원(稷川書院)에서 제향하고 있다.

조임도(趙任道) / 1585년(선조 18)∼1664년(현종 5) / 旅門十哲 / 旅門十賢

조임도(趙任道)의 자는 덕용(德勇)이고, 호는 간송(澗松)이다. 경북 칠곡군 약목면 간송마을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전원생활을 하다가 광해군 3년(1611)에 이황(李滉), 이언적(李彦迪)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정인홍(鄭仁弘)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후 함안군 칠원에 은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대군(大君)의 스승과 좌랑(佐郞)으로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 『금라전신록봉선초의(金羅傳信錄奉先抄儀)』와 문집 6권이 있다. 사후에 지평(持平)에 추증되었으며, 경상남도 함안군 송정서원(松汀書院)에 배향되었다.

조희도(趙熙道) / 1569년(선조 2)∼? / 樑頌15賢

조희도(趙熙道)의 자는 경이(敬而)이다. 장천한(張天翰)의 사위이며, 청송에 거주하였다. 1640년 4월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 양복문(樑腹文)을 작성할 때, 여헌의 주요 문인들과 정사의 위치를 함께 논의하고 협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