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 장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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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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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의 동락서원을 비롯, 영남 지방 8개 서원에 여헌의 위패 모셔져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 담당… 일부 서원은 훼철 이후 복원 안 돼

여헌 선생은 17세기 조선유학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영남유학의 중심 인물이었던 만큼 그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은 여러 곳이다. 여헌이 주로 활동했던 인동을 비롯하여 주요 강학처였던 영천, 선산, 청송 등지의 여러 서원이 바로 그곳이다. 이 서원들은 강학공간과 선현을 추모하는 중심지로 그 역할을 다했지만, 일부는 현재 그 자취만 남아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동락서원(東洛書院)

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서원이다. 효종 6년(1655)에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여헌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숙종 2년(1676)에 ‘동락’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훼철되었다. 그 뒤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됨과 동시에 여헌의 문인인 장경우(張慶遇)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경덕묘(景德廟), 6칸의 중정당(中正堂),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신문(神門), 3칸의 문루(門樓), 4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묘우(廟宇)인 경덕묘에는 여헌과 장경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정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며, 협실의 동쪽 방은 헌관실(獻官室), 서쪽 방은 재실(齋室)로 사용된다. 신문은 제관의 출입문이며,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의 공부 장소로 사용된다. 고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창고지기가 사용하는 곳이다. 이 서원의 강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여헌의 유품 및 문집 7권 등이 있다.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동락서원

금오서원(金烏書院)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 있는 서원이다. 선조 5년(1572)에 최응룡(崔應龍)·김취문(金就文) 등이 부사 송기충(宋期忠)에게 청하여, 길재(吉再)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금오산 아래에 서원을 창건하고 길재의 위패를 모셨다. 선조 8년(1575)에 ‘금오’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지방유림이 부사 김용(金涌)에게 청하여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으며,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사액을 받았다. 그 뒤 김종직(金宗直)·정붕(鄭鵬)·박영(朴英) 등 구미선산을 대표하는 인물 이외에 여헌 장현광(張顯光)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72년에 단청과 기와를 보수하였다. 경내의 주요 건물로는 상현묘(尙賢廟)·재실·정학당(正學堂)·누문(樓門) 등이 있다.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소장전적 6종 23책이 있다.

금오서원

여헌영당(旅軒影堂)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에 있는 사당이다. 여헌의 영정을 모시고 해마다 여헌의 생일인 음력 1월 22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선조 38년(1605) 원회당(遠懷堂)을 낙성한 후 인조 20년(1642) 유엄사(有儼祠)를 세워 영정을 모시고 배향하다가 고종 5년(186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1933년 영당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여현영당

임고서원(臨皐書院)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있는 서원이다. 명종 8년(155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의 덕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임고면 고천동에 서원을 창건하고 정몽주의 위패를 모셨다. 1554년에 ‘임고’라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6년(1603)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이듬해에 다시 사액되었다. 인조 21년(1643)에 여헌 장현광, 정조 11년(1787)에 황보인(皇甫仁)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19년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 왔다. 1965년에 복원되어 위패를 모셨으며, 1980년 정부의 보조로 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존영각·강당·포사(庖舍)·유사실(有司室) 등이 있다. 사우인 문충사에는 정몽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존영각에는 영정이 소장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정몽주의 영정 3폭과『포은문집(圃隱文集)』 목판 113판, 『지봉유설(芝峰類說)』 목판 71판, 『포은집』, 『어사성리군서(御賜性理群書』 11권 외에 200여 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내의 은행나무는 경상북도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고서원

입암서원(立巖書院)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 있는 서원이다. 효종 8년(165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여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숙종 29년(1713) 정사진(鄭四震)을 추가 배향하고. 그 뒤 권극립(權克立)·정사상(鄭四象)·손우남(孫宇男)을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3년에 강당이 복원되고 1974년에 묘우가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3칸의 강당이 있으며, 부속 건물로 선조 38년(1605)에 설립된 일제당(日躋堂), 광해군 선조(1606)년에 설립된 만활당(萬活堂) 등이 있다. 묘우에는 여헌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권극립·정사상·손우남·정사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부속건물은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다. 이 서원의 일원에서는 매년 2월 하정(下丁 : 세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유물로는 여헌의 영정과 마상도(馬上刀)·지팡이·좌장(坐杖) 등이 있다. 이 서원의 일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내의 향나무는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입암서원

송학서원(松鶴書院)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에 있는 서원으로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가 세운 명지재서당(明智齋書堂)이 그 효시이다. 인조 9년(1631)에 서당은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숙종28년(1702) 지역의 유림들이 서당을 모태로 하여 송학서원을 창건하면서 서당을 함께 이건·합병하게 되었다.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4년에 다시 지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목조건물이며, 퇴계 이황(退溪 李愰),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을 배향하고 있다. 이황이 단양부사 부임 시에 “청송 백학은 비록 분수에 없으나, 벽수 단산은 참으로 인연이 있었네(靑松白鶴雖無分, 碧水丹山盡有緣).”라는 시를 읊어 청송을 그리워했다 하여 서원 이름을 송학(松鶴)이라 하였다.

송학서원

천곡서원(川谷書院)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명종 13년(1558) 이조년(李兆年), 이인복(李仁復),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봉서원(延鳳書院)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정구(鄭逑) 등에 의해 천곡서원으로 개명되었으며, 북송 성리학의 중심인물인 정이(程頣), 남송 성리학의 거두 주희(朱熹)와 김굉필(金宏弼)을 배향하였다. 선조 6년(1573)에 이르러 사액되고, 선조 40년(1607)년에 거듭 사액되었다. 인조 1년(1623)에 정구가 추가 배향된 이후, 인조 20년(1642)에 이르러 여헌 장현광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후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왔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고종 5년(1868)에 훼철된 이후 아직 복원되지 못한 상태이다.

천곡서원

빙계서원(氷溪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명종 11년(1556)에 신원복(申元福)·원록(元祿) 형제의 주도로 창건되어 김안국(金安國)의 위패를 모셨다. 선조 9년(1576)에 ‘장천(長川)’이라고 사액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선조 33년(1600)에 옮겨 지으면서 ‘빙계서원’으로 개칭하고 이언적을 추가 배향하였다. 숙종 15년(1689) 류성룡·김성일과 여헌 장현광을 추가 배향하고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祠)·명교당(明敎堂)·동재(東齋)·서재(西齋)·빙월루(氷月樓)·전사청(奠祀廳)·공수청(公需廳) 등이 있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있다가 2006년 의성 지역 유교문화권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되었다.

빙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