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 장현광

  • 생애와 학문
  • 주요저서
  • 유적
  • 유품
  • 문인들

주요저서

> 여헌 장현광 > 주요저서 > 여헌성생문집
여헌성생문집
성리설
역학도설
용사일기

원집 13권, 속집 10권 등 총 12책으로 편찬된 여헌 학문의 결정판
사후 아들 장응일과 문인들에 의해 초간본 간행 이후 여러 차례 중간(重刊)

편찬 및 간행

여헌 선생의 시문(詩文)은 사후에 바로 아들 장응일(張應一)에 의해 수습되기 시작하였다. 장응일은 인조 16년(1638) 봄부터 가장(家藏) 초고를 바탕으로 유문(遺文)을 수집하여, 부지암에 모여 원유(院儒)들과 교정하였다. 다음 해인 1639년에 유문은 일선(一善, 지금의 선산)의 사우(士友)들이 베껴 쓰고 『역학도설』과 『성리설』 중 「경위설(經緯說)」 등은 영양(永陽, 지금의 영천)의 사우들이 베껴 쓰는 등 간행 준비를 해 나갔다. 이후 장응일은 조임도(趙任道), 신열도(申悅道) 등과 함께 편차(編次)를 마치고 인조 18년(1640) 10월 문인 김응조(金應祖)가 인동부사로 부임해 오자 그의 도움을 받아 바로 간행 작업에 들어갔다. 김응조의 연보에도 이 해에 『여헌집』을 교정하였다고 하였고, 1641년 초에 장응일이 신열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해동(解冬)하면 곧 간역(刊役)을 시작할 것인데 모두 성주(城主)의 혈성(血誠)어린 규획(規畫)에 힘입은 것이다.” 하였다.

여헌의 학문과 사상이 온축된 『여헌집』. 여헌 사후 아들 장응일이 주도하여 초간본을 발행하였다.

장응일은 『성리설』을 1641년에 먼저 간행해 놓고, 「평설(平說)」과 「구설(究說)」은 속집으로 내기로 하고 미루어 놓았다. 마침내 1642년에 간행을 완료, 『성리설』 8권 6책과 원집(原集) 11권 6책(또는 5책)의 목판본을 내놓았다. 초간본인 원집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고, 『성리설』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중간(重刊)은 속집의 간행과 아울러 19세기 말경에 가서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초간된 원집에 대해서는 내용 변화 없이 11권(11행 22자)의 편차를 13권(10행 20자)으로 재편하고, 권1의 「무제(無題)」 시를 「분포(盆蒲)」라고 제목을 바꾸는 정도에 그쳤으며, 『성리설』은 제외시켰다. 속집은 초간 때 누락된 시문을 8권으로 편차하고, 부록 2권을 합하여 10권으로 만들어, 원집 13권과 함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중간본 간행 시기는, 먼저 1796년에 완성된 「누판고(鏤板考)」에 속집이 실리지 않았고, 속집 권10에 ‘정종조(正宗朝) 사제문(賜祭文)’이 실린 것으로 볼 때, 1800년대 순조 연간 이후가 될 것이다. 또한 1924년 11대손 장기상(張基相)에 의해 활자로 간행된 『속부록(續附錄)』이 속집의 부록을 보완하는 의미로 간행되어, 속집에 빠졌던 ‘인조조(仁祖朝) 사제문(賜祭文)’과 허목의 제문 등 300여 수가 실렸고, 중간본으로 첫째 장에 ‘1932년 4월 8일 장택상씨(張澤相氏) 기증’이라 찍혀 있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의 판본 상태가 매우 양호한 것 등으로 볼 때, 속집의 간행은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중간본은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는 속집만 따로 소장되어 있다.
한편 연보 3권 1책도 간행되었다. 초간할 때부터 연보의 편정(編定)에 관해 많이 언급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였는데, 1800년대 순조 연간 이후 속집이 나오기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규장각,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83년에는 인동장씨남산파종친회에서 중간본 원집 13권, 속집 10권에다 연보 3권, 『성리설』, 『역학도설』, 『용사일기』, 『급문제현록(及門諸賢錄)』 등을 합하여 『여헌선생전서(旅軒先生全書)』를 영인하였다.

구성과 내용

『여헌집』은 원집 13권, 속집 10권 등 총 12책이다. 원집은 맨 앞에 목록이 실려 있으며, 서(序)는 없다. 권 1~3은 사(詞), 부(賦), 시(詩), 소(疏)이다. 「알포은선생화상사(謁圃隱先生畫像詞)」는 정몽주가 향사된 영천 임고서원에 가 보고 지은 사(詞)이다. 부(賦) 5편 가운데 「야은죽부(冶隱竹賦)」는 54세 때 금오산을 유람하고 이곳에 우거하였던 야은 길재가 심은 대나무를 읊은 것이다. 이 글은 저자가 이들의 학풍을 이었다는 것과 임고서원과 길재를 향사한 오산서원, 금오서원에 모두 배향된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시는 오언절구, 칠언절구, 오언사운, 칠언사운, 오언장편, 칠언장편의 시체별 분류인데 각 시체 내의 분류 원칙은 불분명하다. 전체적으로 영천, 선산, 인동의 경치를 읊은 시가 가장 많고, 오언사운에는 문천상(文天祥)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 다수이며, 정구(鄭逑), 류성룡(柳成龍), 박성(朴惺) 등의 만장(挽章)이 실려 있다. 소(疏)는 선조 36년(1603) 50세에 올린 「의사의성현령소(擬辭義城縣令疏)」부터 인조 14년(1636) 83세에 올린 「사사약물소(謝賜藥物疏)」까지 36편이 저작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특히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지평, 공조참의 등 계속된 관직 제수를 사양하는 상소가 많다. 인조 11년(1633) 80세에 올린 「응지진언소(應旨進言疏)」는 진변(震變)으로 인해 내린 구언의 교지에 응한 것으로 뒤에 정진(貞震) 8괘와 회진(悔震) 8괘의 16괘 배진(排陳)을 붙여 임금의 공구수성(恐懼修省)을 촉구한 내용이다.
권 4~5는 서(書)이다. 권5에 문목(問目)에 답한 서를 따로 모아 놓았다. 문인(門人) 및 오산(吳山), 임고(臨皐), 정산(鼎山), 천곡(川谷) 서원 등에 답한 편지와 역시 이들의 문목에 답한 편지들이다. 문목에는 주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대한 질문이 많다.
권 6~8은 잡저(雜著)이다. 이 가운데 「학부명목회통지결(學部名目會通旨訣)」, 「사물론(事物論)」,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심설(心說)」, 「도통설(道統說)」 등에서는 퇴계, 율곡과는 다른 면모를 지닌 저자의 이기론을 읽을 수 있다. 「문설(文說)」에서는 육경(六經)을 존중하여 고문으로 돌아갈 것을 말하였고, 「노인사업(老人事業)」, 「모령인사(髦齡人事)」는 노인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적었고, 「좌벽소제(座壁所題)」에는 평소 지닐 심법(心法)을 도표로 만든 것이다. 「여헌설(旅軒說)」은 44세에 여헌이라 자호(自號)한 다음 그 호의 의미를 밝힌 글이고, 「주왕산록(周王山錄)」은 44세에 주왕산을 유람하고 쓴 행록(行錄)이다.
권 8~10은 서(序), 기(記), 발(跋), 논(論), 명(銘), 상량문(上樑文)이다. 서(序) 4편 가운데 「역학도설서(易學圖說序)」는 여헌이 지은 『역학도설』의 서이다. 기(記)에는 부지암정사와 입암서원, 모원당 등 우거하며 강학한 곳의 기문 7편이 실려 있다. 발(跋)에는 『야은집(冶隱集)』, 『고봉집(高峯集)』, 『서애집(西厓集)』의 발문 등 13편이 있다. 논(論) 2편 가운데 「문무일체론(文武一體論)」에서는 문(文)은 경(經), 리(裏)가 되고 무(武)는 위(緯), 표(表)가 되어 일체임을 강조하였다.
권 11~13은 축문(祝文), 제문(祭文), 비명(碑銘), 묘갈(墓碣), 묘지(墓誌), 행장(行狀)이다. 오산서원 등의 축문, 정구(鄭逑)ㆍ성혼(成渾)ㆍ박성(朴惺) 등의 제문, 김굉필(金宏弼)의 신도비명, 하위지(河緯地)ㆍ장잠(張潛) 등의 묘갈, 정유(鄭瑜) 등의 묘지, 정구ㆍ박성의 행장이 실려 있다.
속집도 맨 앞에 목록이 실려 있다. 권 1은 사, 부, 시이다. 시는 오언절구, 칠언절구, 오언사운, 칠언사운, 오언장편, 칠언고시, 육언의 시체별 분류이다. 원집과 마찬가지로 문천상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 많으며, 이 외에 차운시와 화운시(和韻詩), 만시(挽詩)와 증시(贈詩)가 원집에 비해 많이 실려 있다. 육언(六言)의 「범주부지암(泛舟不知巖)」은 62세 때 문인 정사진 등과 부지암 아래서 뱃놀이하면서 지은 시이다. 권 2는 소, 서, 답문목(答問目)이다. 소는 의소(擬疏)와 의차(擬箚) 1편씩이다. 의소는 인조 13년(1635) 인열왕후의 상(喪) 이후 괴변의 소식을 듣고서 인조를 권면하기 위해 지은 상소이고, 의차는 연강(筵講), 성지수원대(聖志須遠大) 등 5조로 나누어 권면한 차자이다. 서는 원집과 마찬가지로 정사진, 신열도, 김응조 등의 문인과 임고서원 등에 답한 편지가 대부분이고, 김장생에게 답한 편지도 있다. 답문목 가운데 「답옥산서원(答玉山書院)」은 회재 이언적의 문집 간행과 관련하여 옥산서원 원유(院儒)의 질문에 답한 편지로 주목된다. 권 3은 장(狀), 축문, 제문, 뢰문(誄文), 상량문이다. 장(狀)은 보은현감과 의성현령 때 올린 글이다. 회원서원(檜原書院) 등의 축문, 김주(金澍)ㆍ김우옹(金宇顒) 등의 제문, 홍천뢰(洪天賚) 장군의 뇌문, 오산서원 충효당(忠孝堂)의 상량문이 실려 있다.
권 4~8은 잡저(雜著)이다. 명(銘), 논(論), 기(記), 설(說), 유문 등이 실려 있다. 또 18세에 지은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은 회진첩(會眞帖), 일원첩(一原帖), 부앙첩(俯仰帖) 등 10첩으로 나누어 리(理), 천(天), 지(地), 인(人)의 세계를 도표로 나타내어 설명한 것이고 「만학요회(晚學要會)」는 여헌의 『성리설』에 실린 「만학요회」의 초고이다. 「녹의사질(錄疑竢質)」은 『대학』과 『중용』의 편차나 내용 가운데 의심나는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혀 놓은 글이다. 「평설(平說)」과 「구설(究說)」은 선생이 틈틈이 적어 놓은 이기론을 함께 엮은 글이고, 「관의(冠儀)」와 「혼의(婚儀)」는 각기 그 절차를 자세히 설명해 놓은 글이다. 「갑자추조록(甲子趨朝錄)」은 인조 2년(1624) 인조와 원자를, 「병인추조록(丙寅趨朝錄)」은 인조 4년(1626) 인조와 세자를 만나 문답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권 8 뒷부분은 비갈지명(碑碣誌銘), 행장이다. 김담(金淡)의 신도비명, 이민성(李民宬)의 묘지명 등과 조호익(曺好益)의 행장, 이규문(李奎文)의 행록(行錄)이다.
권 9~10은 부록이다. 조임도(趙任道)의 「취정록(就正錄)」, 신열도(申悅道)의 「배문록(拜門錄)」, 장내범(張乃範) 등의 「기문록(記聞錄)」, 김경장(金慶長) 등의 「경원록(景遠錄)」 등 여헌의 인물과 학문 등에 대한 문인들의 기록과 정종조(正宗朝)의 사제문(賜祭文), 신홍망(申弘望) 등이 지은 제문 등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