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 장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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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영상

명종(明宗) 대에 태어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를 거치며
시대의 아픔을 백성과 함께 한 당대 최고의 지성(知性)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은 1554년(명종 9년) 1월 22일 경상도 인동현
인의방(현재 경북 구미시 인동동)의 남산 본가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덕회(德晦)이며, 여헌(旅軒)은 그의 호(號)이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팽석(彭錫)의 따님이다. 여헌의 집안은 시조 장금용(張金用)이 고려초 인동에 정착한 이래
천여 년 동안 대대로 인동에 살면서 번영을 누린 영남의 유서 깊은 가문이다.
15대손인 장우(張俁)가 대종가에서 분가하여 남산 아래 거주함으로써
인동장씨 남산파(南山派)의 시조가 되었는데, 이 분이 여헌 선생의 5대조이다.

여헌 장현광이 태어난 인동현 인의방(현재 경북 구미시 인동동)의 남산 본가. 현재는 종손이 거주하고 있다.

10대에 이미 학문적 지향과 목표 제시

8세에 부친을 여의고 9세에 자형인 노수함(盧守諴)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10세에 이르러 효경(孝敬)의 도를 다할 수 있을 정도로 학문이
성취되었다. 14세가 되자 집안의 어른인 장순(張峋)에게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8세가 되자 그의 우주사업(宇宙事業)의 요체가 담긴
[우주요괄(宇宙要括)]을 지어 학문적 지향과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우주적 견지에서 자신을 성찰한 중년기

38세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39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북상하는 길목에 있던 인동이 초토화되자 여헌은 인동을 떠나 15년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44세 되던 해에 여헌(旅軒)이라 자호(自號)하고 「여헌설(旅軒說)」을 지어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우주 사이의 나그네이며, 나그네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음을 밝혔다.

50대에 조선 역학의 최고 역작 『역학도설(易學圖說)』 찬술

53세에 이르러 문인인 장경우의 주도로 ‘모원당(慕遠堂)’이 낙성되자 15년 만에 비로소 옛터에 안착하였고, 55세에는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역학도설(易學圖說)]을 찬술하기 시작하였으며, 68세에 이르러 [경위설(經緯說)]을 지었다.

만년에 정치적 경륜 펼치며 정치 안정에 기여

70세에 산림(山林)으로 징소되어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
인조(仁祖)의 자문에 응하였다. 73세에는 인조에게 ‘건극설(建極說)’을 진술하였으며, 75세에는 「만학요회(晩學要會)」, 77세에 「역괘총설(易卦總說)」,
78세에 「우주설(宇宙說)」, 79세에 「태극설(太極說)」을 각각 지었으며, 80세에는 대궐에 벼락이 떨어지자 구언(求言)의 교지에 응하여 공구수성
(恐懼修省)의 도(道)를 아뢰기도 하였다.

죽음 직전까지 저술 작업 계속

81세에 「도서발휘(圖書發揮)」를 저술하였고, 84세에 이르러 오랑캐의 침략으로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인조가 항복하자 영천(永川)의 입암(立巖)으로
은거하여 「이철명(二鐵銘)」과 「좌벽제성(座壁題省)」을 짓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7일에 졸(卒)하였다.

연보(年譜)

1~20세
구분 내용
1세
(명종9년 甲寅, 1554)
인동부(仁同府) 인의방(仁義坊)에 있는 남산구제(南山舊第)에서 정월 22일 미시(未時)에 태어났다.
8세
(명종16년 辛酉, 1561)
6월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9세
(명종17년 壬戌, 1562)
어머니의 명으로 일선(一善)에 있는 자형 노수함(盧守諴)에게 배우러 갔다.
13세
(명종21년 丙寅, 1566)
봉선(奉先)하는 일을 한결같이 고례(古禮)에 따르기를 어머니에게 청하였다.
14세
(명종22년 丁卯, 1567)
집안의 어른인 상사(上舍) 장순(張峋)에게 나아가 배웠다.
18세
(선조4년 辛未, 1571)
「우주요괄(宇宙要括)」을 지었다. /집 안 사람들에게 건의하여 매월 삭망에 모두 종가에 모여 사당에 참배하고, 그리고 자제들을 모아 강독하고 제술(製述)하는 것을 매년 상례로 하게 하였다.
20세
(선조6년 癸酉, 1573)
관례를 행하였다.
21~39세
구분 내용
23세
(선조9년 丙子, 1576)
재행(才行)이 뛰어난 자에 뽑혔다.
26세
(선조12년 己卯, 1579)
청주 정씨에게 장가들어 친영례를 행하였다.
32세
(선조18년 乙酉, 1585)
7월에 부인 정씨가 졸하였다.
37세
(선조23년 庚寅, 1590)
송정(宋淨)의 딸 야로(冶爐) 송씨에게 장가들었다.
38세
(선조24년 신묘, 1591)
10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상제수록(喪制手錄)」을 지었다.
39세
(선조25년 壬辰, 1592)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왜구를 피하여 금오산으로 피난하였다. 6월에 묵방사(墨方寺)로 옮겨 병을 조섭하였다. 10월에 성주의 증산(甑山)에서 소상을 지냈다.
40~49세
구분 내용
40세
(선조26년 癸巳, 1593)
가을에 선조들의 무덤에 성묘하였다. /10월에 자형 임이중(任而重)의 집이 있는 문소(聞韶)의 구지산(龜智山)에서 대상을 지내고 12월에 복을 벗었다.
41세
(선조27년 甲午, 1594)
봄에 예빈시참봉, 가을에 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평설(平說)」을 지었다.
42세
(선조28년 乙未, 1595)
가을에 보은현감에 제수되었다. 9월에 부임한 후 글을 지어 그곳 사람들을 권면하고 경계하였다. 12월에 감사에게 세 번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43세
(선조29년 丙申, 1596)
2월에 또 세 번 병으로 사직을 청하고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와 일선(一善)의 고곡(古谷)에 머물렀다. 3월에 관직을 마음대로 버리고 갔다는 죄목으로 의금부로 압송되었다가 사면되어 돌아왔다. 여름에 영양의 입암으로 찾아갔다.
44세
(선조30년 丁酉, 1597)
봄에 청송의 속곡(涑谷)으로 피난하였다. 「여헌설(旅軒說)」을 지었다
46세
(선조32년 己亥, 1599)
봄에 일선의 월파촌으로 옮겼다. 겨울에 딸을 박진경(朴晉慶)에게 시집보내고 󰡔의례󰡕와 󰡔가례󰡕를 참조하여 「혼의(婚儀)」를 찬정(撰正)하였다.
47세
(선조33년 庚子, 1600)
봄에 임압을 유람하고 바위와 깊은 골짜기, 대, 못, 봉우리, 고개 등에 모두 이름을 지었다. 옥산서원을 방문하였다.
48세
(선조34년 辛丑, 1601)
10월에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으로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겨울에 인동으로 돌아와 종질(宗姪) 장내범(張乃範)의 집에 우거하였다. 「족계(族稧)」를 편찬하고 약조(約條)를 정하였다.
49세
(선조35년 壬寅, 1602)
2월에 거창현감, 3월에 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 9월에 교정낭청(校正郎廳)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1월에 공조좌랑에 제수되자 소명을 받고 나아가 『주역』 교정에 참여하였는데, 3일을 교정에 참여하고 병으로 사직하였다.
50~59세
구분 내용
50세
(선조36년 癸卯, 1603)
2월에 용담현령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고, 9월에 의성현령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51세
(선조37 甲辰, 1604)
봄에 문묘 위판분실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일선 월파촌으로 돌아왔다. 다시 순천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52세
(선조38년 乙巳, 1605)
원당(元堂)에 소재(小齋)를 낙성하고 월파촌으로부터 옮겨와서 거주하였는데 그 집을 원회당이라 명명하였다. 사촌동생 현도(顯道)의 둘째아들 응일(應一)을 후사로 삼았다.
53세
(선조39년 丙午, 1606)
봄에 인동으로 돌아왔다. 모원당이 낙성되었다. 가을에 입암의 만활당이 낙성되었다.
54세
(선조40년 丁未, 1607)
한강 정구와 함께 망우정(忘憂亭)으로 곽재우를 방문하여 함께 용화산 아래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입암사우(立巖四友)에 의해 입암정사가 낙성되었다.
55세
(선조41년 戊申, 1608)
『역학도설』을 찬술하기 시작하였다. 가을에 합천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7세
(광해군2년 庚戌, 1610)
7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부지암정사가 낙성되었다.
58세
(광해군3년 辛亥, 1611)
선산 지역 향현(鄕賢)의 묘전의식(墓奠儀式)을 정하였다.
60~69세
구분 내용
60세
(광해군5년 癸丑, 1613)
오산서원(吳山書院)의 봉안의식(奉安儀式)을 정하고 향례(享禮)에 참석하였다.
62세
(광해군7년 乙卯, 1615)
정월에 아들 응일의 관례를 행하고 「관의(冠儀)」를 정리하였다.
64세
(광해군9년 丁巳, 1617)
세도의 변화를 걱정한 「동야우음(冬夜偶吟)」이란 시를 지었다.
66세
(광해군11년 己未, 1619)
금오서원의 묘(廟), 당(堂), 재(齋)의 이름을 정하였다.
68세
(광해군13년 辛酉, 1621)
「경위설(經緯說)」을 지었다.
69세
(광해군14년 壬戌, 1622)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묘갈명을 지었다.
70~79세
구분 내용
70세
(인조원년 癸亥, 1623)
4월에 왕의 소지(召旨)가 있었는데, 상소문을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6월에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 8월에 사헌부지평, 9월에 사헌부장령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0월에 왕이 교지를 내려 거듭 불렀으며, 윤10월에 또 소지를 내리자 상소문을 왕에게 보냈다.
71세
(인조2년 甲子, 1624)
2월 이괄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피난하자 행재소로 갔는데, 양재역에서 장령을 배수하고, 3월 5일에 대궐에 나아가 숙배하고 자정전에서 왕을 면대하였다. 7일에 사헌부집의, 21일에 특명으로 통정대부의 품계를 더하고 공조참의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였다. 4월 5일에 원자가 사약(司鑰)을 보내어 문안하자 대궐에 나아가 숙배하고 강학청에 나아가 원자를 배알하였다. 8월에 이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72세
(인조3년 乙丑, 1625)
8월에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고, 9월에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73세
(인조4년 丙寅, 1626)
특명으로 형조참판에 제수되자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고 21일에 사직소를 올렸다. 이 날 사헌부대사헌으로 옮겨 제수하자 22일과 23일, 5월 2일, 4일 등 7번 계속 상소하여 사양하였고, 7일에는 대궐에 나아가 숙배하고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으며, 또 세 번 사양하는 글을 올리자 부호군으로 옮겨 제수하였다. 27일에 글을 올려 돌아간다고 아뢰면서 「건극설(建極說)」을 진술하였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의 「신도비명」을 찬술하였다.
74세
(인조5년 丁卯, 1627)
정월에 왕이 본도의 감사에게 특별히 명하여 쌀과 반찬을 하사하였다. 호란이 일어나자 특명으로 호소사(號召使)를 제수하였다.
75세
(인조6년 戊辰, 1628)
3월에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소를 올려 여러 번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만학요회(晩學要會)」를 지었다.
76세
(인조7년 己巳, 1629)
12월에 부인 송씨가 졸하자 다음해 2월에 정부인(鄭夫人)의 묘 왼쪽에 안장하였다.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의 발문을 지었으며, 동강(東岡) 김우옹의 「행장」을 찬술하였다.
77세
(인조8년 庚午, 1630)
4월에 사헌부대사헌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역괘총설(易掛總說)」, 「구설(究說)」 등을 지었다.
78세
(인조9년 辛未, 1631)
「모령인사(耄齡人事)」 4조를 좌벽(座壁)에 써 붙였다. 「우주설(宇宙說)」과 「답동문(答童問)」 등의 글을 지었다. 상소를 올려 원종대왕(元宗大王)으로 추존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뜻을 진술하였다.
79세
(인조10년 壬申, 1632)
「태극설(太極說)」을 지었다. 3월에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사양하였다.
80세~
구분 내용
80세
(인조11년 癸酉, 1633)
인정전에 벼락이 떨어지는 변고가 있어 왕이 구언(求言)의 교지를 내리자 상소문을 올리면서 『주역』의 64괘 가운데 진괘(震掛)가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는 16괘를 가지고 따로 한 책을 만들어 올렸다.
81세
(인조12년 甲戌, 1634)
정월에 자헌대부로 품계를 올리고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제수, 5월에 또 공조판서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가을에 소를 올려 부묘(祔廟)하는 일의 그릇됨을 논하였다. 「도서발휘(圖書發揮)」를 저술하였다.
82세
(인조13년 乙亥, 1635)
5월에 의정부우참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가을에 향교를 이안(移安)하는 의식을 고정(考定)하였다. 제석(除夕)에 「잠경지사(箴警之辭)」를 써서 자손들에게 보였다.
83세
(명종21년 丙寅, 1566)
7월에 특소(特召)의 교지를 내리고 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는데, 길을 떠나 함창에 이르자 병이 생겨 상소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8월에 비답을 내리고 약물을 하사하였는데, 소를 올려 사례하고 말미에 경계의 말을 진술하였다. (이 소장(疏章)은 선생의 절필이다.) 12월에 淸兵이 갑자기 한양을 침략하여 어가(御駕)가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읍에 통유(通諭)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84세
(인조15년 丁丑, 1637)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려 어가(御駕)가 성을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들의 묘소에 작별 인사를 하고 3월에 영양의 입암으로 들어갔다. 「이철명(二鐵銘)」, 「좌벽제성(座壁題省)」을 썼다. 7월에 문인에게 명하여 심의(深衣)를 만들게 하였다. 8월 15일 경신일에 병으로 자리에 누워 9월 7일 임신일에 만욱재(晩勗齋)에서 임종하였다. 부음을 듣자 왕이 매우 슬퍼하시고 조회를 중지하였으며 본도에 교지를 내려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게 하였다. 10월 을미일에 발인하여 고산(故山)으로 돌아왔는데, 상여를 따르는 자가 오 백여 인이었다. 11월에 왕이 홍문관수찬 유철(兪撤)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 주었다. 12월 을유일에 옥산과 십리 정도 떨어진 금오산 동쪽 기슭인 오산(吳山)의 유좌(酉坐) 묘향(卯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삼 백여 인이었다.
인조 17년(己卯, 1639) 12월에 선생의 위패를 오산서원의 야은 길재의 사당에 봉안하였다.
인조 20년(壬午, 1642) 영천의 선비들이 조정에 청하여 선생을 임고서원의 포은 정몽주 사당에 배향하였다. 성주의 선비들도 조정에 청하여 선생을 천곡서원의 정자와 주자 두 선생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선산의 선비들이 선생의 위패를 금오서원에 봉안하고, 영정을 원당(元堂)에 봉안하였다.
인조 23년(을유, 1645) 경상감사 임담에 의해 『역학도설』 9권이 간행되었다.
효종 5년(甲午, 1654) 3월에 선생이 도를 강론하던 부지암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효종 6년(乙未, 1655)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증직하였다. 9월에 부지암서원이 낙성되어 위판을 봉안하였다.
효종 8년(丁未, 1657)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를 더하고, 이조좌랑 김수흥(金壽興)을 보내어 시호를 내려 ‘문강(文康)’이라 하였다. /영천의 선비들이 선생이 임종하신 입암에 입암서원을 건립하여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의성의 선비들이 선생의 위패를 빙산서원에 봉안하였다.
숙종 2년(丙辰, 1676) 청송의 선비들이 송학서원에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부지암서원이 동락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동락(東洛)’이란 동국(東國)의 정자와 주자라는 뜻이다.)
영조 12년(丙辰, 1736) 동락서원 경내에 신도비 건립(미수 허목 찬)
정조 9년(乙巳, 1785) 2월에 왕이 예조좌랑 유경(柳畊)을 보내어 동락서원에 치제(致祭)하다.

여헌 장현광(홍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