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 장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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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교육자이자 철학자로 명망 높아
타고난 재행과 탁월한 인품으로 당대부터 유림의 칭송 높아

여헌 선생은 23세에 재행(才行)이 특출난 인물로 조정에 천거된 것을 시작으로 만년인 82세에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기까지 그의 학덕과 인품으로 인해 많은 벼슬을 제수받았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관직 생활에 종사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외직으로는 선조 대에 두 번 지방관으로 부임한 것이 전부이며, 내직으로는 49세 때에 공조좌랑에 제수되어 교정청에서 잠시 『주역』 교정에 참여한 것과 산림(山林)으로 징소(徵召)되어 인조 2년(1624년)과 인조 4년(1626)에 각각 사은(謝恩)하고 돌아온 것이 고작이었다.

전란 이후 국가질서 개편책 제시한 경세가

하지만 여헌 선생은 당대 영남을 대표하는 산림으로서 왕의 자문에 응하여 군주의 도덕적 완성을 촉구하였으며, 조정의 화합과 사론(士論)의 통일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정묘호란 이후에는 내수외양(內修外攘)에 기초한 국가질서의 재편을 역설하는 등 경세가적(經世家的)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하였다.

강학을 통한 교육자적 면모 발휘

특히 여헌 선생은 시대를 뛰어넘어 공자의 교육 정신을 본받아 일생의 대부분을 향촌에 은거하면서 강학 활동에 매진하였으며, 짧은 관직생활에서도 고을의 자제들을 모아 강학한 교육자였다.

우주사업을 역설한 철학자로 평가받아

또한 여헌 선생은 우주의 중심에서 도덕 세계의 실현을 꿈꾼 철학자로서 인간을 삼재(三才)로 인식하는 유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인간 가치의 근거를 밝히고, 그 가치 실현을 위해 천하에 제일가는 사람이 되기 위한 우주 사업을 역설한 철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여헌은 18세에 학문의 방향을 확립한 이후 그 길을 따라 평생토록 매진한 성실한 학자였으며, 말년인 84세에 이르러서도 “사람이 어찌 한 가지 선을 가지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으며, 또 어찌 노쇠하였다고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좌벽제성(座壁題省)」을 지어 벽에 걸어 놓고 스스로 반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헌의 초상화는 총 3개가 현존한다. 문인 김응조가 선산부사로 부임하여 1633년에 처음 제작하였고, 이후 인동의 부지암, 선산의 원당, 영천의 입암에 각각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여헌의 화상(畵像)에 대해 문인 김휴(金烋)는 다음과 같은 화상찬(畵像讚)을 남겨 여헌의 인품을 기렸다.

선생의 화상(畵像)에 공경히 찬(贊)하다

  • 마음은 이치를 간직하여
  • 달을 비추는 가을물과 같고
  • 덕(德)은 용모에 나타나
  • 온 방안에 봄바람이었네.
  • 태산(泰山)의 높음과 같아
  • 그 높음을 알 수 없고
  • 바다에 임한 듯하여
  • 그 깊음을 헤아릴 수 없노라.
  • 행하고 감춤은 자신에게 있고
  • 나아가고 물러감은 의리를 따랐으니
  • 염계(濂溪)처럼 깨끗하고
  • 소자(邵子)처럼 안락하였네.

여헌에 대한 당시의 세평

한강(寒岡) 정구(鄭逑) : “후일에 우리의 사표(師表)가 될 사람은 이 사람(여헌)뿐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 “이 사람은 단정하고 확고하며 혼후하고 침잠하여 그 뜻을 빼앗을 수 없고, 도량의 크기를 볼 수 없으며, 그를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취하게 하니 후일 세상에 이름을 떨칠 대유(大儒)가 되어 사도(斯道)의 맹주가 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 “장여헌은 옛 대신(大臣)의 풍도(風度)가 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 “장여헌의 연원은 후생이 감히 알지 못할 것이 있다."
인조(仁祖) : “5백 년 만에 한 번씩 나는 우리나라의 큰 그릇이다.”
미수(眉叟) 허목(許穆) : “출사(出仕)할 만하면 출사하고 은거할 만하면 은거하며, 높은 관직을 보기를 뜬구름 보듯 하며, 시골에서 아무런 욕심 없이 자득(自得)하여
작록(爵祿)이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부귀도 그의 절개를 바꾸게 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