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 장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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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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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인동(仁同), 영천(永川), 선산(善山)에 3대 강학처 소재
평생 강학에 몰두하며 수많은 문인 배출

평생을 학문 연구와 강학에 몰두하였던 여헌은 인동을 비롯하여 영남의 여러 곳에서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헌이 나고 자란 인동의 부지암정사를 비롯하여, 영천의 입암정사, 그리고 선산의 원회당은 그의 여러 강학처 중 3대 강학처로 손꼽힌다.

인동의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

여헌 나이 57세 때인 1610년 문인 장경우(張慶遇)가 고을의 선비들과 함께 낙동강변 부지암의 동남쪽 언덕 위에 여헌을 위해 지은 정사이다. 여헌이 이 정사를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라 명명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부지암정사는 여헌 학문이 구체적인 저술로 드러나는 모태이자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강학처의 중심지이다. 여헌이 세상을 떠난 후 부지암정사 자리에 ‘부지암서원(不知巖書院)’이 세워졌고, 숙종대에 ‘동락서원(東洛書院)’으로 사액되었다. 그러나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현재 복원된 동락서원의 오른쪽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부지암정사는 동락서원이 훼철된 뒤인 1885년에 중건되었으나 이후 퇴락을 거듭하자 1975년 다시 지은 것이 현존하는 부지암정사이다.

인동의 부지암정사

영천의 입암정사(立巖精舍)

입암의 네 벗으로 불리는 권극립(權克立), 정사상(鄭四象), 손우남(孫宇男), 정사진(鄭四震)의 요청과 도움에 힘입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영천에서 여헌이 강학하던 곳이 입암정사이다. 입암 근처에 조성된 입암정사는 여헌 생전에 이들에 의해 지어졌는데, 대청인 일제당(日躋堂), 대청 좌우에 위치한 우란재(友蘭齋), 열송재(悅松齋)로 구성된 강학의 공간이다. 이 밖에도 정사상, 정사진 형제가 여헌을 위해 여헌의 살림집인 만활당(萬活堂), 경제당(敬躋堂) 등도 인근에 지었다. 일제당은 선조 33년(1600)에 건립된 건물로 기암절벽을 등지고 서 있는데, 그 기암이 바로 입암리와 입암서원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선바위 즉 입암(立岩)이다. 이 공간을 바탕으로 가사문학의 대가인 노계 박인로(朴仁老)가 「입암가(立岩歌)」 29수와 「입암별곡(立岩別曲)」을 남김으로써 이후 이곳은 조선조 문학의 공간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순종 1년(1907년)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는 의병조직이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맞아 입암전투를 벌였는데 일제당은 이때 소실되었다가 1914년 복원되었다. 당시 일본군이 만활당도 불태우려 하였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입암서원과 그 부속건물인 일제당, 만활당 등은 ‘입암서원 일원’이라는 명칭으로 경상북도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천의 입암정사

선산의 원회당(遠懷堂)

경북 구미시 선산읍 생곡동(구미시 유학길 136-21번지) 원당마을 뒤편에 있는 여헌의 처소 중 하나로서 여헌의 나이 52세 때 그의 생질인 노경임(盧景任)이 원당에다 작은 집을 지어 여헌이 살도록 한 곳이다. 원당은 월파촌 위쪽에 있는데, 여헌은 그곳의 지세가 높으면서 툭 트인 것을 보고 좋아하였다. 그래서 노경임이 문인들과 의논하여 작은 재실을 짓고 여헌 선생에게 월파촌으로부터 옮겨 와서 거주하도록 배려하였으며, 여헌은 그 집을 ‘원회당’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여헌이 세상을 떠난 후인 선조 20년(1642)에 유엄사(有儼祠)를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享祀)하였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1933년에 영당(影堂)이 중건되었다.

선산의 원회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