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 장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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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관으로서의 여헌의 공적을 기리는 청덕비, 전설을 간직한 유산 등
여헌 선생의 인생행로 따라 영남 지역은 물론 충청 지역에 유적들 산재

두 차례 외직을 맡았던 여헌은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선정을 베풀어 해당 고을의 백성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이에 따라 여헌과 관련된 여러 비석과 유적이 관련 지방에 산재해 있다.

여헌신도비(旅軒神道碑)

경북 구미시 임수동 동락서원 내에 위치한 비석이다. 영조 12년(1736)에 동락서원 경내에 세웠다. 비문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짓고, 글씨는 옥천(玉川) 조덕린(趙德璘)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현손(玄孫)인 장동식(張東栻)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헌신도비

의성청덕비(義城淸德碑)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 소재한 의성향교의 광풍루와 명륜당 사이에 세워진 비석이다. 이 비석은 여헌이 의성 현령 재임시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선조 37년(1604년)에 건립되었다. 전면에 ‘縣令 旅軒 張先生 淸德碑(현령 여헌 장선생 청덕비)’라고 새겨져 있다. 원래는 대로변에 있었던 것을 일제 초기 도로공사를 하면서 의성향교 앞으로 옮겼다가, 광복 후 향교 내로 옮겨 비각을 세웠다.

의성청덕비

보은청덕비(報恩淸德碑)

충북 보은군 보은읍 죽전 2리에 있는 비석이다. 전면에는 ‘縣監 張侯 顯光 淸德碑(현감 장후 현광 청덕비)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萬曆 二十四年 丙申 五月 日 立(만력 24년 병신 5월 일 립)’이 새겨져 있다. 만력 24년은 선조 29년(1596년)에 해당한다. 여헌이 42세 때인 선조 28년(1595) 가을에 보은현감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어 군민들이 세운 비석이다. 선생은 세 번 사직의 뜻을 충청감사에게 전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자 그 직을 그만두었고, 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떠나는 날 보은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머무르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보은청덕비

치마바위

충북 보은군 마로면 적암리와 경북 상주 사이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에는 선생이 보은 현감을 사직하고 귀향하던 중 부인이 보은 백성들이 선물한 속곳을 입고 있음을 알고 그곳 바위 위에 속곳을 벗어 두게 하고 경상도 땅으로 넘어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명 ‘속곳바위’라고도 부른다.

치마바위

여헌대(旅軒臺)

경북 청송군 부남면 장기리(일명 구천동)에서 북동쪽으로 올라가면 병풍을 세운 것처럼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데, 이것이 여헌대이다. 높이는 40m, 넓이는 150m가 된다. 선생이 임란때 피난을 왔다가 율곡, 사계 선생이 먼저 피난지지로 자리 잡은 곳이라는 말을 듣고 절벽 위 세 곳에 세 개씩 돌을 쌓아 흔적을 남기고 영천 입암으로 떠났다고 한다. 돌무더기는 하나만 남았지만 그 상단 돌이 길이 180cm, 폭이 130cm나 되고 두께도 40cm가 넘어 절벽 끝에 어떻게 쌓았는지 불가사의하다. 또 선생이 영천의 한 노인으로부터 ‘솔송(松)자 이름이 있는 곳에 피난을 하라.’라는 말을 듣고 가족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피난하여 전란을 피했으며, 그 후 사람들이 여헌의 호를 따서 ‘여헌대’라 부른다는 전설도 있다.

여헌대

구지뫼(龜智山) 은행나무

경북 의성군 금성면 구련 1리에 위치한 400여 년 수령의 은행나무. 선조 36년(1603) 9월, 여헌 선생이 의성 현령으로 부임하자, 이 동네에 살고 있던 자형 임이중(任而重)이 처남인 여헌을 초청하여 기념식수한 것이라 전한다.

구지뫼 은행나무

동락서원 은행나무

경북 구미시 임수동 동락서원 앞에 있는 수령 400여 년의 은행나무. 둘레가 4m 50cm가 넘고, 높이가 약 30m에 달한다. 여헌 선생이 부지암정사에서 강학할 때 손수 심은 것으로 전한다. 이 나무는 주변에 수나무가 없는데도 해마다 많은 열매가 열려 신이(神異)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동락서원 은행나무